(그때나 지금이나,) 한때의 감각: 정경빈의 ‹하얀벽› 앞에서
콘노 유키
하이트컬렉션에서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 «이미지들»(2023.7.7.-9.17.)에 정경빈의 회화 작업 ‹하얀벽_ 바디› (2023)가 걸려 있다. 제목대로 본다면, 이 작업은 감상자 눈앞에 분명히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회화 작업인데 그것은 벽이 아니다. 심지어 더는 하얀색으로 채워지지 않은, 다른 색—빨강이나 검 은색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제목이 가리키는 하얀 벽의 존재는 더 불가사의 하다. 부분적으로 하얀 색을 깨뜨리는 색과 형상이 보이는데도 이 회화는 ‘하얀 벽’이라 이름 지어졌다. 화면상의 하얀색에 집중한 질문에 이어, 공간에 집중한 질문이 제기된 다. 회화를 하얀 ‘벽’으로 부른다면— ‘벽’에 집중해 서 본다면 — 작품에서 환영적 공간감이 결여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회화’를 하얀 벽이라고 부른다면 —이를테면 회화에 집중해서 본다면 — 벽처럼 공간으로 물러서서 거기에 일체화하는 대신 작품이 독립적으로 있어야 한다. 색과 공간에 대한 질문은 회화라는 물성을 두고 전개된다. 정경빈의 이 회화는 전체가 다 하얗다기에는 얼룩져 있고, 벽이라기에는 독립적이고 약간의 환영감을 준다.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이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시리즈처럼 몇 년 동안 작업되어 왔기 때문에 사태는 더 복잡 해진다. 그가 2020년에 제작한 ‹하얀벽›은 전체적으 로 하얗지만 벽보다 작은, 22.7×15.8cm 크기로 제작 되었다. 윤택이 있는 표면 때문에 타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이다. 공간에 맞춰서 소개된 ‹하얀벽_ 나는 내가 내 몸의 일부인 것을 잊는다› (2020)나 제목에 명확한 대상이 들어간 ‹하얀벽_가오리와 가자미› (2020) 등 그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시리즈라 하기에는 제목에 다양한 소재가 같이 들어가고, 표현 또한 일관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하얀벽›은 작품 자체로 딜레마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하얀벽›이라 이름 지어진 작품 중 하나만 봐도 색채와 크기 때문에 하얗게도 벽으로도 보기 힘든데,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작품과 이것을 비교하자 면 그 정체가 더 불확실해진다. 이 불확실함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하얀 벽” 이라 주장하는 단언적 성격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벽›의 존재를 두 가지의 무의식적 존재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하얀 색인 채로 있는 대신, 그 빈 공간에 작가의 욕망이나 기억이 나타나고 투사되었다고 보는 시각과, 전시장이라는 제도적 공간의 존재를 부각시켰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전자는 작가의 내면을 향한 독해로, 후자는 전시의 내적 조건으로 작품을 보는 태도이다. 딜레마는 숨겨진 내면/내적 조건의 안착과 드러내기로 해소된다. 보이지 않는 ‘그곳’에 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답이 되어버린 ‘그곳’에 도달하는 태도와 달리, 필자는 불명확한 곳으로 하얀벽을 보고 싶다. 캔버스라는 물체를 마주하는 첫 순간에 하얀 벽이 세워짐과 동시에 작가 또한 세워진다. 이를 앞에 두고 작가의 그림자가 비치고 손끝이 닿는 물성과 동시에 그 너머를 보려고 할 때, 이름 받은 ‘그곳’으로 무언가를 해소하는 대신 충돌되는 장소로 ‹하얀벽›은 존재한다. 말하자면 ‹하얀벽›은 그곳을 이곳 — 캔버스, 회화 작품, 회화 작품이 있는 곳 — 에 완벽하게 옮길 수 없는 채 로 작가의 내면과 캔버스 너머의 시각을 막아서고 불완전하게 놓아두는 곳이다.
이때 불완전성은 물성과 시간성에 대한 시각에서 접근했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강조된다). 이 접근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불완전성이 내면/내적 조건 대신, ‘한때’를 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경빈의 ‹하얀벽›에서 ‘한때’는 특정 시기나 사건을 현재로 그대 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작가가 이전 기억이나 감각을 작품에서 현재로 끄집어낼 때, 그 결과는 어렴풋이 혹은 어설프게 현재화된다. 캔버스의 첫 상태인 하얀 벽은 공간 — 기억이라는 내면의 공간, 실제 경험했던 장소, 재현된 환영적 공간 — 을 향하지만, 여전히 하얀 벽이다. 설령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다고 하더라도 캔버스라는 물성을 넘어 통과해서 볼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거울처럼 완전히 비칠 수도 없으 며, 존재의 모호한 흔적들이 표면에 아른거린다. 이 아른거림을 해소하는 대신 불확실함으로 담은 곳이 ‹하얀벽›이다.
개인전 «다리없는산책» (상업화랑 을지로, 서울, 2022)에서 작가가 고민한 주제는 이 ‘한때’의 감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리가 없더라도 디딜 곳이 있는 산책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자면, 한때의 감각은 ‹하얀벽›에 잠시 머무른다. «다리없는산책»에서 소개되기도 한 ‘서울’이나 ‘남해’처럼 특정 장소가 이름 붙은 작품도 작가의 그때 그곳의 감각은 지금이라는 화면에 흔적을 잠시 드리울 뿐 확실한 공간 — 기억 이라는 내면의 공간, 실제 경험했던 장소, 재현된 환영적 공간— 을 화면 안에 오롯이 담지 않는다. 시간적 괴리를 그때가 아닌 지금에 재-활성화하는 감각은 어설프고 어렴풋할 수밖에 없는 덜-활성화된 채로 현재에 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정경빈의 회화는 작가라는 주인의 손을 떠나 전시장에서 유물처럼 남는다. 한때는 그때 그곳을 지금으로 똑같이 가져오는 대신, 시차와 시간적 경과 속 변화를 무릅쓰고 지금으로 이어져 ‹하얀벽›을 존재하도록 한다. 하얀 벽은 지금 눈앞에 없지 않다. 여리고 가냘픈, 그렇지만 물성적으로도 개념적으로 확실한 존재이다. ‹하얀벽›은 한때 하얀 벽이었고 그 한때 — 기억과 감각을 작가가 떠올린, 시간적으로 벌어진 그 때를 작품에 지금 담기 때문에, 여전히 하얀 벽이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은 회화에서 무엇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그린다는 난제, 바꿔 말해 딜레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회화에 있어서 무엇을 그린다는 말에서 무엇은 명확한 공간을 향하고 대상으로 금방 그려지기 쉽다. ‹하얀벽›은 확실한 곳을 향할 수 는 있어도 불명확함으로써 담기는 곳으로 존재하며, 회화의 재현 (불)가능성을 둘러싼 딜레마를 수용하는 곳이다. 존재의 모호한 흔적들이 표면에 아른거리는 자리로써 ‹하얀벽›은 세워졌다. 마치 처음의 캔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 너머에 바로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그 안에 완벽하게 다시 만들 수 없는, 그러나 한때로 향하는 감각을 확실히 받아주는 이 불확실한 곳 앞에, 보는 사람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