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아니라면,
허호정
2020
1. 주장
정경빈의 이 ‘추상된(abstracted)’ 화면은 무언가를 주장한다. 그는 보는 이의 눈에 직 접적으로 환기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배면에 두고 그것을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 들을 만든 것은 신체라고, 그것도 속박된 신체, 상자에 갇히거나 침대에 붙들려 있으 며, 근육과 신경에 통증을 느끼고, 미끄덩대거나 거칠고 불쾌한 무엇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신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캔버스가 덕지덕지 묻고 흘러내리 고 짓이긴 물감을 보여줄 때, 평면을 부비고 찌르며 간질이는 붓의 터치를 보여줄 때, 우리는 이를 신체의 투사(projection)이자 투시(penetration)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재현
정경빈이 전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글을 풀어내면서 빚게 되는 오해의 지점이 있다. 스스로를 ‘환영(illusions)’이라 말하는 그림들은 고통을 겪던 몸 (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미지가 되기 위해 그 몸 (들)과 그 아픔, 부자유, 억압 등을 전제한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에 글로 접근 하며, 나 자신이 품게 된 어떤 오해를 발견한다. 아래는 질문의 형태를 한 오해이다.
첫째, 그림은 고통을 ‘반영’ 혹은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그렇게 실 효가 없다. 그렇다고 말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그림은 어떤 종류의 고통과 ‘연 관’을 맺을 수 있다. 정경빈의 주장이 문제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시각적 이미지 가 필연적이고도 자연적으로 고통을 반영한다거나 표현한다고 볼 근거는 없는데, 그 시각적 이미지가 고통과 연관된다고 말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이때, 정경빈의 이 그림 들은 직접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신체가 등장하지도 않고, 아픔을 환기할 만한 어떤 도상적 관습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둘째, 왜 어떤 공포/트라우마/비극/고통은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 장면의 잔혹성과 직접성이 불편을 야기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로부터 비켜선, 애써 ‘재 현하지 않는’ 이미지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정경빈은 이러한 이미지 만들기를 통해 그 자신의, 혹은 사회의 어떤 공포/트라우마/비극/고통을 ‘재현 하지 않고 우회하 며 “다른 진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정경빈의 이 그림들에는 그 ‘단서’가 없다. 이것들은 고통과 비극의 상태를 지시하지 않고, 증언하지 않는다.
사실, 정경빈의 그림은 고통을 반영하거나 표현하지 않으며 재현을 의도하지도 않지 만 이 모두를 꿈꾸는 상태인 것 같다. 그 결과, 우리가 보는 것은 물줄기, 물감, 빛의 어 른거림, 붓의 자국, 붓으로부터 유래한 과 같은 흔적, 드리워진 그림자, 흰 색의 벽, 그 벽을 채우는 회반죽, 하얀 자락, 파도, 입김, 유령 그런 것들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3. 비극 이후
아우슈비츠 이후, 9.11 이후, 세월호 이후, 그리고도 수많은 개인적• 사회적 비극의 이 후에 위치한 작품과 전시는 스스로 ‘주제 삼는’ 이야기의 증명과 증언, 애도 그 이상/초 과에 도달(해야) 한다.
자주 예술은 ‘감히’ 트라우마와 비극을 재현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여겨졌다.
발화하는 예술은 당사자성이라 할 만한 자질을 갖추지 않는 한 금기시되었고, 그렇지 않다면 ‘당사자’로부터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한편에서 이것이 예술을 제한하는 일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 우려는 앞의 비난이 일종의 검 열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미지가 포르노적으로 소비되는 대신 그 자체 의 자율성과 당대성을 확보하고 고유의 가능성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
연대기와 시대착오, 무시간성을 경유하고 자리한 현재에 예술은 그 자신의 자율성을 작품과 전시의 형식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이미지는 온-오프라인에 그 자신의 물리적 현존을 내보이며 고유의 투쟁과 정치를 시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비평은, 단 지 비극을 소비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사건의 서사화와 증언 및 진술의 어 법을 ‘변증법적으로’ 재고하여 현재에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들에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비평은 어떤 비극, 피해와 질병, 그 고통의 개인사와 연관된 작품/전시 에 대해 다시 말할 수가 있는 것이며, ‘증언/재현 불가능성’을 둘러싼 길고도 치열한 논 쟁의 역사를 스스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비평의 관심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의) 비극들 자체가 아니라, 다시 정위하는 비극들의 현재적 관점과 이에 관여하기로 결심한 어떤 예술 작품과 전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예술 작품과 전시가 주제 삼는 내용과 엎치락뒤치락하는 형식 자체를 주의한다. 무엇보다도 이 내용과 형식의 역학 관계를 엄밀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4. 전환
다섯 살 난 로르는 동생과 흰 색 침대보를 가지고 논다. 가만히 정지한 상태로 자기 몸 을 침대에 뉘인 후, 동생에게 그 위로 침대보를 덮으라 시킨다. 그리고 정적. 마치 죽은 사람처럼 로르는 침대 위 하얀 천 아래에 몸을 가만 둔다. 이윽고 동생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 그때 번쩍 일어나 로르가 동생을 놀래고, 이런 놀이가 계속되면 울음 소리 는 솟구치는 웃음 소리로 전환된다. 로르와 동생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떤 사물은 특정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 기억은 때로 가혹하고 슬프며 아프다. 그러나 사물은 그 기억과 조금씩 다른 위치에 놓이고, 이러한 자리 바꿈은 아픔과 고통을 다 른 것으로 치환한다. 로르와 동생의 하얀 침대보 자락은 어머니의 차가운 몸을 덮던 그 것과는 다르며, 그 다름을 계속 상기시키는 놀이로 승화된다. 새하얀 천의 오르락 내리 락, 이 이미지는 기억을 다르게 작동시킨다.
정경빈은 병든 몸이 겪어야 했던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고통, 억압과 부자유의 상태를 기억한다. 그에게 어떤 벽, 회백색의 벽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병원의 긴 복도, 낡은 건물의 층계참, 빗물이 젖어 드는 창, 수의, 거품, 타액, 고문, 억압, 유령 같 은 것. 전시장을 가득 메운 높이 193cm의 캔버스들은 이런 기억을 공유한다. 이것들은 모두 가로막힌 벽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몸으로부터, 흰 색의 벽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작가는 흰 벽을 벽인 채로 두지 않고, 그 위로 색을 더한다. 환상의 빛, 살이나 털의 결, 담가 놓은 대야에서 펄떡이는 정어리 같은 것, 볕, 그늘, 그림 내부에 위치하 는 또 다른 프레임, 얼룩, 물방울, 붓 자국 들을 흰 색 위로 타고 오르게 하면서, 벽을 다른 환상으로 치환한다.
이제 이 그림들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자기 신체와 병에 대한 개인적 고백으로부 터 그것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완전히 치환된 어떤 ‘이미지’로 자 처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사건과 비극 자체의 이미지로의 변환이다.
재현을 애써 거부함으로써 비극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 자체 로부터 출발하여 전환되는 이미지이다.
아마도 이 다음을 생각해야 할 텐데, 그것은 정확히 고통을 직시하는 모양이지 않을 까? 그것이 위로가 아니라면, 정경은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게 될까?
1. 최종철, 재난의 재현’이 ‘재현의 재난’이 될 때-재현불가능성의 문화정치학”, 「미술사학보』 (42집), 2014.
2. Georges Didi-Huberman, “By the Desires,” Uprisings(Paris: Jeu de Paume), 2016, 28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