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제로에서 또 계속하기
양효실
2022
정경빈의 2022년 개인전 <다리없는 산책(Walkingwithoutlegs)>의 작품들은 재현적이거나 이미지주의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몸으로 방문하고 눈으로 보았던 풍경이 비교적 저채도의 물감을 사용한 짧고 반복적인 붓질로 대체되면서 지워진, 풍경화로서의 감상이 불가능할 만큼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려진 나무꽃계절숲의 흔적/암시 같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더럽고 지저분한 그림”이다. ‘회화’의 권위를 무서워하지 않는 초심자의 그림 같고, 건물 뒤에 버려진 그림 같고, 감상을 원하지 않는 그림 같고, 개인전에 미흡한 그림 같다. 그림을 잘 그릴 줄 알고, 오랜 기간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수행해온 자신의 지금-그림들을 저렇게 평가하는 작가의 비판적 자의식이 보여주듯이, 혹은 기존의 자신의 회화적 기법과의 결별을 공표하는 저 문장이 보여주듯이 이번 개인전은 어떤 ‘시작’, 소속과 인정을 전제한 그림들로부터의 떠남과 비동일시와 물음을 전면화하는 쪽으로 넘어감을 공표한다. 일부러 못-그린 그림, 혹은 자신의 기예(art)를 버린 그림이라는 행위(act)는 다르게 그리겠다는 선언으로, 이전의 자신에 대한 안티테제적 부정으로서 개인전이란 의례를 통과하려는 것이다. 규범으로서의 회화에 맞서 자기자신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단, 편입과 포섭이 아닌 분기와 이탈로서 자기 회화를 만들겠다는 각성인 것이다. 연속성과 일관성으로서의 자기, 남들이 알아보는 자기를 잃으면서 새로이 획득해야 하는 회화로의 여정에서 이번 개인전은 도입부나 ‘문’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즐길 수 있는 제목을 붙이는 대신에, 작품들의 제목을 하나같이 ‘이상하게’ 만든 작가의 그림들은 감상이 아닌 ‘읽기’를 강요한다. 작가의 작업의 구조, 내부를 확인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나는 우선 이번 전시의 일관성인바 잘-그리지-않기를 보충하는 제목의 특이성에 우선 주목한다. 가령 서울20/21/22, 동탄호수21, 석관21, 금호20, 포천21, 뉴욕19-20, 철원21, 브루클린22, 황학20, 남해21와 같은 방식으로 작가는 자신이 방문한 곳과 방문 연도를 제목으로 사용한다. 몇몇 경우에는 중간에 쌍점(:)을 집어넣고 제목들을 보충설명하기도 한다. 가령 <서울20:다리없는산책>, <포천21:여자바위어깨>, <서울22: 복사뼈언덕과 여자갈비뼈폭포>, <뉴욕19-20:점에 기대는 믿음> 같은 식이다. 작가가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에 방문한 곳들이고, 특정된 장소들과 붓 칠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그림들이고, 쌍점 뒤에 붙은 부제는 너무 특이해서(idiosyncratic) 보고 읽는 자가 투사/동일시를 할 수 없는 문장/명사구이다.
코로나 시기와 거의 겹치는 기간에 작가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핸드폰이나 사진기로 찍고 그것에 의지해서 그리는 기존 방식을 거부한 채 오직 방문하고/보고/감각한 이후의 인상과 기억에 의지해 작은 캔버스에 붓질들이 훤히 드러나는 그림을 그렸다. 기억/ 인상으로서의 붓질이 물리적 장소에 대한 신체적 방문에 토대한 것임이 중요한 듯 작가는 객관적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과 화가로서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는 주장이 그림과 제목 사이에서 읽히고 감지된다. 마치 오래전 일기에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해 둔 그날 그곳의 경험을 지금 현재로 재경험하는 ‘쓰니’처럼 이 그림들은 ‘그때 그곳’이 열리는 데 충분한 장치로 기능하는 것인지 모른다. 동글동글한, 길쭉길쭉한, 퍼져 나가는, 마구 덧칠한, 뭉갠 듯한 붓질은 어떤 마음의 글자, 암호, 필사일지 모른다.
2019년부터 4년간 그린 소품들과 연관해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없었다면 나는 이번 글을 저런 식의 연상, 주관적 인상으로 채웠을지 모른다. 다행히 나는 사건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조금 더 탈구축된 이 그림들에 다가갈 수 있었다. 2016년 교통사고 이후 마침내 섬유근육통이란 병명을 얻기까지 온갖 병원을 전전하며 이름 없는 병-꾀병을 앓는 환자, 혹은 거짓말쟁이로 대우받았던 시기 이후에 이 그림들이 그려졌다는 이야기를. 나는 잘 그리는 그림을 그리던 작가가 잘 그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데 그 경험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상상하려고 한다. 내가 읽었던 글들은 온전한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옮겨지는 ‘대상’,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받는 대상의 경험이 어떻게 탈종속으로서의 주체화의 기회를 일으키는지를 계속 이야기해주었기에 나는 정경빈이 온당한 병명을 얻지 못한 채 의사/전문가들 혹은 병동과 병동을 떠돌던 2017년 이후 겪었던 고통, 불안, 수치심, 우울이 정경빈에게 다른 그림을 그릴 기회를 주었다고 적을 것이다.
검색해 찾아본 바로는 섬유근육통은 “전신을 휘도는 신경회로의 무한루프”라든지 “신체적인 통증만이 아닌 불안, 우울, 인지장애, 집중력 저하와 같은 정서적으로 보이는 문제”라든지 “증상을 앓는 이들의 60% 이상이 우울증을 경험하는 병”이라든지 “꾀병으로 오인당하기 일쑤인” 병이라든지 “아직 그 원인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통증”이라든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발생비율이 9배 정도 높은 질병”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명확한 정의가 불가능한, 인접한 질병이나 증상이 너무 많아서 다른 질병이나 증상으로 처방되기도 하는 ‘모호한’ 증상이다. 섬유근육통의 원인은 교통사고가 수십 가지의 원인 중 하나가 될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작가가 암병동을 방문하고, 방사선치료나 MRI를 계속 받고, 침치료나 요가까지 받아야 했던 이유이다. 자신이 앓는 증상에 대한 환자/당사자의 발화는 들어주는 사람에 의해 비로소 사회적 의미나 의학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런 ‘인정’을 얻는 데 작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주로 여성이 걸리는 병, 고칠 수 없는 병, 그러므로 돈이 안 되는 병, 소수자로서의 질병/증상을 겪으면서 정경빈은 소통, 전달, 이해가 매번 실패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호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섬유근육통은 정경빈의 일부이고, 모르는 타자에 겨우 붙여진 이름이고, 육체의 타율성을 표상하는 이름이다.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방문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그곳의 ‘기념비’를 인격체로 느끼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사전적으로는 ‘핵폭탄이 터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를 뜻하는 그라운드 제로는 여러 역사적 비극/사건이나 행동주의 단체에 의해 전유해 왔고,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는 9.11로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를 가리킨다). 돌아와서는 『정동 이론』¹을 읽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그림들, 정경빈의 그라운드제로를 채운 그림들, 작가가 “기념비적인” 그림이라고 부르는 그림들, 작은 그림들이 쌓여갔고 자연스럽게 이번 전시가 열렸다고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 “다리없는산책(Walkingwithoutlegs)”은 장소를 방문하고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찍은 뒤에 그리는 예전의 그리기가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표지한다. 다리가 없는 사람, 걸을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보고 감상하는 자의 ‘전제’가 사라진 사람의 산책의 결과 보고전인 셈이다. 건강을 잃은 사람, 대상을 보고 즐기는 주체의 안전한 자리가 확보되지 못 한 사람, 섬유근육통을 앓는 사람, 안과 밖의 경계선이 흐릿한 사람이 ‘보는/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앞서 예시했듯이 쌍점(:) 뒤에 붙은 몇몇 설명문에서 ‘다리’, ‘어깨’, ‘복사뼈’, ‘갈비뼈’같은 인체의 부분들이 저쪽의 풍경/대상으로 옮겨가서 그것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이유이다—가령 <서울20:다리없는산책>, <포천21:여자바위어깨>, <서울22: 복사뼈언덕과 여자갈비뼈폭포>에서처럼. 주체와 대상의 경계는 흐릿해졌고 작가의 몸의 일부가 보이는 풍경으로 넘어가 그것이 되어 있고, 풍경이 심지어 젠더화되어 있다. 작가-나와 바깥-너는 분리불가능한 ‘관계’ 속에 공존하고, 그러므로 이 그림들이 거리를 전제로 한 ‘눈’으로 본 것들을 더 이상은 그릴 수 없게 된 여성-화가의 정직한 그림, 타자-신체-바깥에 휘둘리는 ‘비인간’의 상태에 대한 도큐먼트라고 말한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 작가는 많이, 과잉으로, 미친 사람처럼 볼 수 있다. 건강한 자들의 풍경화를 그렇게 침식하고 전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포천의 폐채석장의 화강암 돌산을 “미끄덩미끄덩해 보인다”고 감각하고 돌아와 그곳을 여성화, 물질화해서 그 증거물을 남겼다. 일전에 돌이 ‘육체’라고 말하는 어떤 깨달은 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돌의 육체성에 대해서라면, 항상 더 많이 보고 더 느끼는 트랜스 상태의 시인의 시에서 이미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은 결국 이전의 나를 (일부) 잃는 박탈과 함께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내 의지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은 ‘경험’ 때문에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정경빈은 이런 그림을 앞으로 10년 정도 그리고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곧 그녀는 서른이다).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부정하거나 삭제하는 대신에 더 넓고 길게 잡아서 그것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 아주 많은 그림으로 자신의 그라운드제로를 채우는 것, 쌓는 것, 짓는 것, 환대하는 것. 그러다가 뭐가 되어 있는 것.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의 여러 이름들 중 하나로 수렴되겠지만, 이름은 애당초 정의 불가능한 것들을 겨우 감싸 안을 수 있는 껍질이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¹ 멜리사 그레그 외,『정동 이론』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갈무리,2010).